[1995~1998년] 화가 이정연①‥순수 조형성으로 환원
RHEE JEONG YOEN‥‘만남’시리즈, 절박함 배어있는 정신성
[▲ 만남, 295×200㎝ 캔버스에 혼합재료, 1997] 이정연은 붓질과 기호들이 하나의 세계를 이룬 작품들을 보여준다. 그곳에는 이 작가만의 신체성에 연유한 제스처와 도상들이 단호하게, 자유롭게 펼쳐져 있다. 그것은 손놀림, 몸동작이 작업이 되어버린, 그것만을 보여줄 수밖에 없는 모종의 절박함이 배어있다. 그 절박함은 그러니까 자신의 내면세계, 이른바 정신성과 관련된 것들을 가시화시키기 위해 선택되는데서 연유한다.
Rhee, Jeong Yoen shows a world of his works through handling of his brushes and his taste. His gestures and imagine of art derived from the artist’s physical condition spreaded firmly and freely in the world. A certain urgency that she must show her works by moving her hands and body is infiltrated into her works. The urgency is derived from selection in order to show her inner world, is every things related to her soul.
[▲ 210×148㎝ 장지에 혼합재료, 1996] 이정연 작가의 작품은 추상적이다. 구상적이지 않다는 이유에서이다. 추상은 두 가지 패러다임을 가진다. 그 하나는 칸딘스키적인 ‘비대상’의 패러다임으로 작품의 세계와 그 어떤 지시적, 표 상적 관계를 맺고 있지 않는 대신 내적인 필연성, 즉 주체의 내면을 환기시킬 수 있다는 가정이다. 여기서 상징유형의 확인은 해석에 따라 무한히 가변적이다. 다른 하나는 몬드리안적인 ‘환원’의 패러다임이다. 이는 주관적인 표현은 자의적이므로 가능한 한 주관을 거제하고, 세계를 ‘순수조형성’으로 환원시켜가야 한다는 역사주의적 가정이다.
The art works of Rhee Jeong Yoen are abstracts, because it is not concreteness. Abstract has two paradigms. One is internal inevitability instead of not relating to any oder, representation with the world of art work of Kandinsky’s “non subject” as an example. It can awaken the internality of subject. At this point, it is very changeable by depending on the interpretation of confirmation of symbol style. The dther one is paradigm of Mondarian’s “restoration”. This subjective expression is possibly restrained by own will to restore. It is a historical supposition of getting to restore pure modeling.
[▲ 265×194㎝ 캔버스에 혼합재료, 1997] 그러나 이정연의 ‘추상’은 그 어느 한쪽으로 밀어 넣기가 애매해진다. 그의 추상은 정신적인 세계와 더 많이 관여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주체의 내면과 관련되겠지만 그림을 통해 그 많은 생각의 갈래를 다 알기란 불가능하다. 어떻게 우리가 다른 이의 마음속을 들어가 볼 수 있겠는가? 다만 오해와 억측, 눈짐작으로 얼추 다가서렬 수 있을지 모르겠다.
However, Rhee, Jeong Yoen’s abstract is vague to take any side. I think his abstract is concerned with the spiritual world and more things. It is impossible to know every idea of way through his painting. How can we see into other’s mind? I think it is only possible to guess with eye measure.
[▲ 265×194㎝ 캔버스에 혼합재료, 1997] 동양화를 전공하고 미국에 가서 회화와 미술이론을 공부하고 온 작가는 그런 면에서 동양과 서양의 회화와 사유의 세계를 한 자리에 접목시키는데 용이한 입지를 지닌 셈이다. 오랜 시간의 외국생활 역시 그런 거리감, 생각의 완충지대를 보다 효과적으로 확보하게 해 주었으리라는 생각도 든다.
Artist who study oriental painting, the painting and the fine art theory from United States, has benefited to graft into one place of speculation world, oriental, and western painting. Maybe, I think long term of aboard life may keep the distance. A buffer zone of thinking takes a place efficiently.
△글=박영택(미술평론가)/Park Yung Taek(Art Critic)
[▲ 193×97㎝ 장지에 혼합재료, 1997] ## 이코노믹 리뷰 / Life&People / 문화 / 권동철 (미술 컬럼니스트) / 02.10.2017 ##